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변질된 유교적 전통 (문단 편집) == [[제사]] == 조선시대의 제사는 지금처럼 제사 음식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정 형편에 맞게 음식을 올렸다. 즉, 제사 음식이라고 특별히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먹던 반찬을 그대로 올려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제사의 의의는 후손이 조상께 예를 다하는 것이기에 '''집안의 후손들이 직접 음식을 차려서 제사를 지냈다.''' 그 집안 후손이 아닌 며느리들은 원래 시가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딸도 제사에 참여했다. 시집 간 누나가 자신의 집에서 제사상 차리고 남동생이 누나의 집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제사상을 차리는 건 노비들이 했지, 며느리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가 자기 친정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딸이 제사를 지내고 다른 형제들이 그 집을 찾는 사례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족보]] 매매로 인해 가짜 양반이 급증했고,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실상 행정적 족보가 박살나면서 너도 나도 양반을 칭하고 다니면서 양반처럼 보이기 위해 허례허식이 늘어나던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제사상에는 [[신선로]]가 올라가든, [[삼겹살]]이 올라가든, [[피자]], [[치킨]]이 올라가든 아무 상관이 없다. 어동육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 제사상 차리는 말들은 조선시대에도 없었던 '''창작된 가짜 전통이다.''' 실제로 제사와 [[성묘]] 등으로 대표되는 [[종가]] 중심의 문화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설득력과 우월함,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당시의 독재 정권 체제 아래서 전통문화를 손대어 급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양반 [[코스프레]]이면서 일종의 문화적 [[프로파간다]]라는 것.[*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던 주자가례에도 없다. 애당초 주자는 제사 자체에도 부정적이었지만 정적들의 비난에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인정한 편에 가깝다.] 종가들을 보면 집안마다,[* [[퇴계 이황]]의 [[http://naver.me/GIqSpTcK|종가에서 차리는 설 차례상]]을 보면 과일 3~4종류를 1개씩 총 1접시, 전(두부부침) 1접시, 건어물포 하나, [[떡국]]은 모시는 조상 1명당 1그릇이 끝이다. 민간에서는 상다리가 휘어지다못해 상차리는 사람들의 몸과 재정이 휘청거리는데, 정작 한국 유교의 대표격인 [[이황]] 선생의 종가에서는 저렇게 간소하다. 떡국도 원래 차 한 잔이었던 것을 떡국으로 대신한 것 뿐이니, 실제로는 더 간소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혹은 지역마다 제사 지내는 방식이나 올리는 음식이 다르다.[* 제주도 지역에서는 제사상에 빵을 올린다. 제주도의 지리 특성상 쌀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의 제사는 허례허식의 측면도 있겠지만, 동시에 일종의 잔치 같은 측면도 존재했다. 이 시대에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고기를 입에 댈 수 있었던 것은 [[추석]], [[설날]], 제사, 가장의 생일 딱 이 정도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타문화권에서 평범하게 하는 축제나 잔치의 성격을 마찬가지로 종교성을 띠고 있는 제사가 적절하게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